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빈 존스 (문단 편집) === [[존 콜트레인]] 쿼텟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엘빈 존스와 콜트레인.jpg |width=100%]]}}} || || ''' 엘빈 존스(왼쪽)와 존 콜트레인 ''' || >엘빈 존스: 이 밴드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인간관계에 완벽한 하모니 같은 게 있다면 이 밴드가 가장 가까웠을 것입니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1968/05/18/a-walk-to-the-park|#]] >인터뷰어: 특히 [[파로아 샌더스]]처럼 강력한 남자의 존재가 당신을 자극한다고 생각하나요? > >[[존 콜트레인]]: 그래요, 밴드에 항상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해요. 옛날 밴드에서는, 엘빈 존스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알죠? 라시드 알리(Rashied Ali)[* 엘빈 존스의 뒤를 이어 존 콜트레인 쿼텟의 영입된 드러머.]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전개되지 않았어요. (중략) 나는 그곳에서 엘빈의 천재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는 매일 밤 꾸준히 연주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고 원하는 모양을 갖추기까지 약 2년 반이 걸렸습니다. [[https://aadl.org/node/197863|#]] 1960년, 엘빈 존스는 드러머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의 뒤를 이어 [[존 콜트레인]] 쿼텟(4중주단) 밴드에 합류해 음악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많은 레코딩과 투어에서 탁월한 연주를 보여줬기 때문에, 콜트레인이 신뢰하는 음악적 동반자가 됐다. 또한 엘빈은 존 콜트레인 쿼텟에서 리듬과 멜로디를 탐구했으며, 다양한 드럼 [[편곡]]과 연주 기법들을 시험했고, 자신만의 특유의 드럼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와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Jimmy Garrison)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강력하고 역동적이며 활기찬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엘빈은 콜트레인과 함께 일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연주 능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밴드 리더로서의 존 콜트레인의 [[윤리]]와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재능을 존경했다고 말했다. 엘빈은 더 나아가 밴드의 경험이 자신에게 다른 음악 세계의 취향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콜트레인과 마찬가지로, 엘빈은 왕성한 음악적 체력과 창의성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엄청나게 긴 솔로 연주를 폭발적으로 보여주는 타고난 재능이 결합되어 있었다. 존 콜트레인 쿼텟의 응집력과 창작력은 1960년 10월 스튜디오 세션에서 보여줬다. 당시 이들은 단 일주일동안 총 3개의 앨범을('My Favorite Things', 'Coltrane Plays the Blues', 'Coltrane’s Sound')을 녹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특히 'My Favorite Things'은 콜트레인의 대표적인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콜트레인과 함께라면 여기 뉴욕에 일자리가 없다면 [[시카고]]나 [[세인트루이스]], [[멤피스]] 등 어디든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국을 여행하고 스테이션 왜건에 쌓여 출발했습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3,000마일을 가는 데 사흘 밤낮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장에 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과 다른 점입니다. 하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것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일할 시간이 되면 사람들을 가끔 보다가 일이 끝나면 모두 사라지는 오늘날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콜트레인 그룹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특별했습니다. [[https://jazztimes.com/archives/elvin-jones-at-this-point-in-time/|#]] 다른 밴드들과 달리, 콜트레인 쿼텟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어떠한 [[리허설]]도 하지 않았다. 콜트레인 쿼텟의 공연은 아무런 사전 연습 없이 자연스럽게 연주를 진행했는데도, 엄청난 명연주가 탄생했다. 그리고 엘빈과 콜트레인 모두 30분이 넘는 긴 세션 동안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솔로나 듀엣을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졌다. 테리 그로스와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엘빈은 연주를 시작할 때까지 자신들이 무대에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콜트레인 쿼텟 멤버들 모두 콜트레인의 뒤에서 일제히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다고 설명했다. [[https://freshairarchive.org/guests/elvin-jones|#]]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엘빈 존스와 밴드의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는 자신들의 연주를 넓히고 심화시켰다. 콜트레인 밴드의 상호작용 수준이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My Favorite Things'의 레코딩은 스튜디오 녹음보다 라이브 공연이 훨씬 더 절제된 소리를 들려줬다. 당시 엘빈은 존 콜트레인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0장이 넘는 콜트레인의 음반에 참여했으며 수많은 투어와 라이브에 참가했다.[* 워낙 많은 레코딩들을 녹음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음반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많은 [[명반]]들을 녹음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음반은 '[[A Love Supreme]]'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앨범이 콜트레인의 최고작이자 드러머 엘빈 존스,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음반이라고 평하고 있다. 각 멤버들의 최고작일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음반은 트럼펫 연주자 프레디 허버드(Freddie Hubbard), 색소포니스트 아치 셰프(Archie Shepp), [[파로아 샌더스]]가 참여한 'Ascension'이다. 이 앨범은 단 하나의 40분짜리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엘빈은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폭발적인 연주를 추진해 뛰어난 연주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1966년 1월 엘빈은 존 콜트레인 쿼텟을 떠났다. 콜트레인이 새로 영입한 드러머 라시드 알리의 음악 스타일과 성격은 엘빈과 완전히 상극이었다. 엘빈의 [[폴리리듬]] 스타일이 라시드 알리의 "다방향" 접근법과 충돌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심지어 알리는 건방지고, 예의가 없는 거친 성격의 사람이었으며, 사사건건 엘빈의 심기를 건드렸다. 알리는 후일 인터뷰에서 "'빌어먹을, 난 정말 드럼을 못치는 놈인가 봐, 왜냐하면 엘빈 존스는 현장에서 최고의 드러머니까'라고 당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제 감정이었고, 저의 자아였고… 그리고 저는 거기에 있고, 매일 밤 엘빈 존스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https://drummagazine.com/the-magnificent-life-of-elvin-jones/|#]]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1967년에는 [[존 콜트레인]]이 사망했다. 존 콜트레인 쿼텟 활동 당시, 엘빈 존스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 중 한 명[* 60년대 당시 엘빈 존스는 재즈 매거진 다운비트에서 선정한 올해의 재즈 드러머 순위에서 거의 매년 상위권에 올랐다. 1965년, 1966년, 1968년, 1969년에는 1위를 차지했다. [[https://rateyourmusic.com/list/Maccycor/down-beat-readers-poll-results-1938-1970/1/|#]]]이 됐다. 또한 그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음반에 사이드맨(Sideman)으로 참여해 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60년대에는 [[블루 노트 레코드]]와 [[임펄스! 레코드]]를 중심으로 [[웨인 쇼터]], [[그랜트 그린]], 조 헨더슨(Joe Henderson), 리 코니츠(Lee Konitz), 프레디 허버드, 래리 영(Larry Young), 케니 버렐(Kenny Burrell), 라산 롤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앤드류 힐(Andrew Hill) 같은 저명한 아티스트들의 [[명반]]에 드러머로 참여해 탁월한 연주를 보여줬다. 당시 큰 명성을 얻은 엘빈은 자신이 밴드 리더가 되어 여러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